산업화의 대량생산과 정보화시대의 편리성으로 체계적이고 세분화된 소비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소수의 생산자가 제공하는 카테고리 안에서 스스로의 시각을 잃은 채 살아가는 지금 "미술"이라 불렸고 말해왔던 고유영역은 장인의 계보를 잊듯 힘겹기만 하다. 반면 '목적성을 가진 자극물'이라 칭해왔던 예술의 변두리 영역은 통신기술의 발전을 타고, 밀려난 본가의 빈자리를 채워나간다. '대화와 화합의 시대'를 외치는 지금 어떠한 장르적 구분도 필요치 않는다.
양영순 [아색기가 시리즈 중(Asaekkika Series)] digital print 28×20cm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밖·미술」전은 이러한 연합미술이 선보인 자리였다. 근대미술에 대한 정리나, 대표적 작가의 초대전이 어울릴 듯한 보수적 이미지를 지닌 국가의 대표적 미술관이 지극히 대중적 성향의 주요 아티스트들에게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관객의 이에 대한 반응 역시 지대했다. 미술관 측에서 사진촬영을 불허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장 곳곳에서 소리 없는 플래시가 계속하여 번쩍인다.
함께 열린 기획전 「일상의 연금술」전이 기존 기득권 미술 중심의 영역에서 현대적 흐름에 맞춰 확장된 통합영역으로의 진군이라면, 「미술·밖·미술」전은 통합영역에서 중앙으로의 진군을 보는 자리라 할 수 있다. 영화 포스터, 신문의 카툰, CF 등 제3의 영역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는 일련의 미술작업이 순수미술의 중심권으로 군림해온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벤트 전시가 아닌 기획전으로 선보인 것이다.
전시를 보는 초반엔 이색적인 작업이 주는 즐거움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중반에 다가서면서 이러한 작업이 현대 사회의 특성에 의해 새로이 성장한 신미술이 아닌, 르네상스 미술의 계보를 이어온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성경의 한 구절을 담은 종교화와 같이, 영화 포스터 한 장을 통해 영화를 보면서 받았던 감동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특히 영상 소프트웨어 플래시로 제작된 영화홈페이지는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갤러리에선 만나기 어려운 작업이지만, 웹상의 가상영역을 새로운 공간으로 인정하여 바라본다면 과거의 미술 황금기를 만든 실내인테리어 작업이 가상공간에서 새롭게 부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이러한 신미술 영역이 전시 제목과 같이 "미술의 밖에 있는 미술"로 불리는 것은 고유의 미술영역이 지극히 개인적인 순수한 작업으로서 발전되어가는 것에 반해,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한 홍보의 발전과정 위에 성장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러한 구분과 설명, 그리고 이해는 작가와 관객에게 필요치 않다고 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미술·밖·미술」전은 분명 관객이 원하는 작품이 소개되어,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심어준 의미 있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artprice & raview 20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