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17 14:32:00
News+News 미술인회의 발족 미술인의, 미술인에 의한, 미술인을 위한 단체는 글/Dunpeel 사진/정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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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 오프라인 미술단체 출범
올해 미술계는 감정의 동요 없이 지켜 볼 수 없는 사건의 연타였다. 예술과 외설의 시비, 미술품 양도차익 종합소득세, 미술교육 축소, 형식적인 미술문화 지원 등. 감정을 정리하고, 객관적으로 문제에 접근할 틈도 없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술인들에게 새로운 공통적 특징이 생겨났다. 부당한 제도적, 사회적 피해경험자라는 것이다. 정기적 행사처럼 반복되는 문제에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일시적인 해결점을 찾아 나가는 대물림, 새로운 문제에 속수무책으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시간들. 계속되는 사건만큼이나 인권보장 속에 자유로운 창작환경의 절실함은 커져만 갔다. 이에 2003년 미술인들의 온라인과 오프라인 대화는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특히 온라인의 경우 꾸준히 방문하여 참여하지 않으면, 지금 어떤 문제들이 화두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빠르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다. 온라인 토론은 미술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술인이 한데 모이고, 의견을 말함에 있어 관습적 영향을 받지 않아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허나 의견을 정리한 후, 토론을 통해 얻은 결론적 입장을 각자 자신의 활동 단체, 분야에 맞는 성격으로 추진해 나가는 움직임은 있어도, 토론을 함께 이끌어 나갔던 이들이 함께 공동의 목소리로 이뤄나가는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것이 온라인 토론의 한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온라인을 통해 열띤 토론을 함께 나누었던 몇몇 이들이 온라인 토론의 한계에 새로운 제안을 던졌다. 논쟁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추론된 결론을 토대로 직접 활동을 전개하는 단체를 제안한 것이다. 이들은 온라인상에서 연락을 취하여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으고, 단체의 형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 첫 모임이 2003년 4월 5일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다. 참가자는 강홍구 공성훈 김복기 김준기 박찬경 배영환 박찬국 서진석 안규철 오혜주 백기영 전정옥 이관훈 이병한 이태호 유근호 장경호 전승보 전용석 정정엽 홍현숙 황세준(총 22명). 이들은 이날 ‘미술인회의(가칭)’로 단체명을 정하고 새로운 단체의 필요성부터 성격, 규모, 주체 등 포괄적인 내용을 논의하여, 이태호 주비위원장과 12인의 실무팀을 선출하였다. 이후, 총3차의 주비모임 전체회의와 4차의 실무팀 회의를 갖고 5월 29일 홈페이지(www.misulin.org) 오픈을 통해 취지문과 창립을 위한 준비과정을 공개하였다.
꼭지점 없는 단체에 대한 불안은
창립대회를 통해 결정된 미술인회의 정관 제1장 총칙 제2조를 보면 미술인 회의는 ‘이념과 계파를 넘어서는 미술인과 미술향유자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에 의해 시각예술의 창작, 유통, 향유에 있어 합리적인 미술문화와 제도를 정립하고 미술의 사회적 기여를 확대함’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곤 해도 정관을 통해 본 미술인회의의 목적만 보고 ‘미술인 회의가 무엇이다’라고 말하긴 힘들다. ‘무엇’이라고 말하는 데는 뚜렷한 특징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여러 단체 중에서 미술인회의가 그만의 색을 갖지 못한다면, 목소리 하나를 둘로 나눠 그 힘을 분쇄시키는 꼴이다. 또한, 단체의 시작에서 특별한 색을 갖지 못하면 방향성을 잃을 위험도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술인회의에 대한 ‘색’에 관련 내용을 Q&A게시판에서 보았다. 그리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색에 대한 질문에 ‘특별히 어떤 색을 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굳이 말하라면 무지개와 같이 다양한 색을 가진 자유로운 연대다’라고 다소 추상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흑백논리가 아닌 자유로운 방향과 융통성 있는 단체를 지향해 나가겠다는 내용인데, 역으로 보면 이것은 ‘특별한 색을 갖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내용 또한 Q&A 게시판의 ‘다른 미술인단체와의 관계는?’이라는 질문의 답변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답변인즉슨 ‘미술인회의는 범미술인들의 네트워크를 지향하므로, 목적을 공유하는 미술인 단체와 공조, 연대 등, 모든 논의에 열려 있다’고 말한다. 효율적인 단체의 관리 운영에서 볼 때, 모호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단체로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술인회의는 온라인의 다양한 미술인들의 글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직접 행동으로 옮겨진 단체이다. 미술인회의의 회원이기 이전에 각기 자신의 뚜렷한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다. 그렇기에 정의 되지 않은 색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홈페이지가 생긴 이후 지금까지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듣고 싶어 하는 이와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글이 충돌하고 있다. 또한, 간간히 운영위원들이 미술인회의에 대해 정의하는 글들을 올려 미술인회의 혼란에 촉매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게시판과 회의록 자료를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의문의 방향을 잘못짚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방향의 특징이 왜 없을까?’가 아닌 ‘특별한 방향의 특징을 왜 잡지 않으려는 걸까?’였다.
자유게시판을 통해 본 내용 중 가장 많은 빈도수를 차지하는 지적이 ‘모호한 방향성’이다. 기타 여러 단체의 자유게시판에서도 ‘미술인회의의 모호한 방향성’에 대한 지적을 하는 글을 접할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이유로 인해 ‘미술인회의의 미래는 불안하다’라고 속단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미술인회의 준비운영위원들이 이에 대한 특별한 답변을 준비하지 않는다. 흔히 웹상에서 ‘태클’이라 불리는 글과 답변이 올라온다 해도 자유게시판의 익명에 중요성을 말하며 지켜나간다.
그 이유는 미술인회의는 처음 시작의 목소리가 만들어진 곳이 온라인 미술게시판이고, 회원들의 주요 참여 루트 또한 온라인 미술게시판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를 실천하지 못하는 온라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작되었다. 어떠한 문제든 상하관계 없는 발언 속에 올바른 결론을 찾아내어 실현해 나가는 것이 미술인회의다. 그렇기에 모순이라 볼 수 있는 자유로운 발언대는 혼란이 아닌 미술인회의에서 빠질 수 없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술회의에 특정이념이 자리잡는 것은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만들어내는데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다.
만약 미술인회의가 뚜렷한 성격을 정하기 위해 이념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미술인 누구나 참여하여 자유로운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미술인회의 운영위원회는 끊임없는 논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의도적인 노력이라도 해야할 것이다.
미술인의 이름으로
흔히 참여와 결정의 권한을 갖고 있는 자를 권력자라 말한다. 미술인 회의는 회원의 투표로 운영위원과 감사를 선출하고, 선정된 운영위원은 운영위원장을 선출한다. 또한, 정관의 변경과 안건에 대한 투표역시 모든 회원의 참여로 이뤄진다. 운영위원이 가진 권력이라면 회의에 대한 안건과 일시 장소를 정할 수 있고, 내규를 정할 수 있는 정도라 하겠다. 이외에도 미술인회의의 정관을 읽어보면 참으로 민주주의적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과연 이것이 지켜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시작과 진행이 다른 여타의 단체를 경험해 보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인회의가 생겨나게 된 바탕을 보았을 때, 결코 불가능 할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미 안건에 대한 토론문화가 자리잡혀 있는 단계에서 시작하였고, 무엇보다 현 미술계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숙지하고 있는 미술인이 만든 미술인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술인회의는 창립대회를 갖고 실무 운영위원을 선출하였다고는 해도, 내규 확립과 대외적인 미술인회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단계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인회의의 내일을 넘겨짚고 찬물을 붇는 것은 미술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미술인회의는 미술계의 참 발전을 꿈꾸는 미술인들의 참여에 의해 그 미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0월 2일 국내 개봉을 앞둔 영화 {이퀼리브리엄 Equilibrium} 은 ‘인간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느냐?’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세계 3차대전이 끝난 21세기 초. 독재자는 ‘인간의 감정’이 전쟁과 사회문제의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감정 말살 정책을 시행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 리자}를 가볍게 소각시켜버리는 영화 속 주인공(후에 주인공은 감정을 되찾고 독재에 대항한다). 이 영화에선 소설, 음악, 미술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는다. 문화 박멸의 극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영화라지만, 어떻게 이런 세상이 가능한 걸까? 영화는 간단하게 설명한다. 인류의 감정을 통제하는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이 21세기에 발명되기 때문이라고.
미술인으로서 2003년 미술계를 바라봄에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면, 스스로가 “혹시 ‘프로지움’에 통제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을 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