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art+

아토마우스, 대중을 유혹하다

Dunpeel 2013. 5. 4. 23:43

2003-12-03 15:50:07

 

 

 

 

거리의 결투(116.5X90.5cm)2001


아토마우스, 대중을 유혹하다
이동기' CRASH / 일민미술관 / 8.29~9.28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만큼이나 대중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현대미술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현대인의 문화코드와 이동기의 문화코드가 맞다'고 하겠다.

보는 족족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고 작품의 메시지가 쏙쏙 전달된다. 참으로 편하고, 즐거운 미술이 아닌가?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를 놓고 '만화냐? 미술이냐?'부터 '이미 미키마우스를 토대로 태어난 아톰을 왜 다시 한번 미키마우스와 교배시켰냐?'까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 없다고 본다. 굳이 이동기와 아토마우스를 연계시키라면 '이동기가 평소 잠들기 전 꿈꾸던 정의의 히어로'라 말하겠다.

이번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전시내용은 꾸준한 관심을 보여 온 '아토마우스'시리즈와 작가의 삶 속에 강한 기억을 남긴 이미지가 1, 2층으로 나뉘어 전시되었다.
그렇다고 이동기의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으로 '단지 하고 싶은 것을 소재로 한 미술'이라고 볼 순 없다. 개인적인 요소에 대중적인 코드를 맞춰나간 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작품을 보면 작품의 구도가 참 보기 좋다.
그것은 단지 화면을 효과적으로 채우기 위한 소재의 배치 이상이다. <국수를 먹는 아토마우스>를 보자.
끊어지지 않는 한도에서 자유로운 면발이 왜 하필 그렇게 말렸을까? 작가가 관객을 위해 만들어 낸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보기 좋은 선의 휘말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것은 근거 없는 딴지다. 개인적인 관심사를 그렸는지, 관객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맞춰나갔는지는 작가만이 알 일이다. 그래도 결과야 어찌되었든 이동기는 대단하다. 그는 직접 하였기 때문이다. 좀더 작품스러운, 좀더 무언가 함축적인 듯한, 좀더 언발란스한 확장을 위해 머리를 싸매는 가식을 이동기는 날려버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대단하냐?'고 반문 할 수 도 있겠다. 이러한 반문을 자연스럽게 던진 사람에게 당신 또한 대단하다고 답변한다.

현대에 와서 특히 국내 현대미술의 갈래란 것은 혼란스러운 미술의 교통정리면서 우아한 자존심을 만들어 버린 잣대이다. 언제부턴가 순수미술은 순수한 자신만의 창조가 아닌 물질에 대한 순수한 작업으로, 도도한 콧대가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물질에 순수한 낡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만이 작가인가?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다고 보는 게 현 미술계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이동기는 일을 저질렀다. 순수미술을 미술의 본가라 하며 타 장르를 받아들임에 조심스러운 국내 미술계에서 이동기는 '아토마우스'를 꺼내놓은 것이다. '아토마우스'는 그래도 꽤 설명이 되는 작업이다. 그 외의 작품들은 미술로서 접근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 미술이라 불리는 잣대를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이동기는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가로 급부상하고 있다. 학력, 경력, 평론으로 성장하는 대다수의 작가와는 다른 길로 자라나고 있다. 대중에 의해서 말이다. 타 장르에서는 대중에 의한 성장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화와 디자인 등 자꾸만 멀어져가는 미술장르에서도 가장 큰 권력자는 대중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미술의 본가만 무슨 똥배짱인지….

누가 알겠는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일이백년 안에 만화 혹은 디자인이 미술의 전통적 계보를 이어나갈 지 말이다. 고대벽화부터 미술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의 사랑이 늘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관심이 없는 장르가 계속하여 성장할 수는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를 접하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동기의 작품 앞에 모이는 대중 또한 늘어가고 있다. 그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냐? 국내 현대미술계에서 보기 드물게 대중과 잘 어울리는 작업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