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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

Dunpeel 2017. 12. 30. 17:34

 

 

십여 년 전,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처음 낸시랭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역시 베니스 비엔날레의 퍼포먼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디서 어떤 경로였는지는 모르지만, 보도자료 자체가 신선했다.
'초대받지 못한... ' 이라는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붉은색 비키니에 쿠사마 야요이를 연상시키는 보디페인팅.
퇴마의식이라도 치르는 것 같은 퍼포먼스로 가득하던 시대였기에, 낸시랭이라는 젊은 여성의 비키니 퍼포먼스는 충분한 볼거리(이슈)가 되었다.

그 후 몇 개월이 지나면서 본격적인 낸시랭의 한국 활동이 시작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받지 못한 젊은 아티스트의 쇼는 성공적이었다.
풍문으로 낸시랭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상(작가)을 파악하고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진행되는 일이 근본을 찾고 정리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확실치 않은 모호한 약력들이, 차마시며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기자들에게 좋은 안줏거리가 되었다.

처음 낸시랭을 본 것은 회사 편집실이었다.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
또렷한 울림에 뒤돌아보니 '아! 저 사람이 낸시랭이구나'라고 한눈에 알아볼 만한 의상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대뜸 악수를 청하며 "아티스트 낸시랭이에요" 
후에 두 차례 더 마주치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미지메이킹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캐릭터가 완성되어 있었다.

"아티스트 낸시랭이에요" 처음 마주하게 된 인사말이 썩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인사말 뒤로, 내가 감히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 너에게 인사를 건넸다라는 느낌이었다.
이미 풍문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잘 모르는척 인사를 건네고, 보도자료를 받고 그녀가 뭔가를 요구했는데 내가 들어주지 않은 기억이 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동에서 한차례 더 마주쳐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후 생각보다 많이 보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평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한주에 두 차례 정도 화랑가를 돌아다녔는데, 
나갈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낸시랭을 보았다.
'아! 저 사람 정말 부지런하구나'

이후 홍대 희망시장과 프리마켓 쪽에 대해 취재하면서 홍신포쪽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낸시랭이 희망시장쪽 사람(K)과 관련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유럽쪽에서 아트 마케팅을 하는 오래전 친구(H.JH)를 통해, 베니스 비엔날레 퍼포먼스부터 한국 활동까지의 낸시랭의 활동 배경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본 것이 미술기자를 그만두고 처음 기획한 기획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획전 오픈에 축하 인사차 왔는데 안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감히 직접 여기까지 와서 너에게 인사를 건넨다라는 느낌으로 "아티스트 낸시랭이에요" 인사를 했다.
작품들을 같이 감상하면서, 처음으로 그녀의 탄탄한 캐릭터 외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건담이나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캐릭터에  대한 관심들.
영국의 센세이션과 타카하시 무라카미 등의 하비아트가 강세였던 시기였다.
그녀는 나름 미술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또한 퍼포먼스만으로 구체화되지 못하는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의 단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낸시랭은, 성공에 대한 욕망과 채워지지 않은 그릇을 가진 순수함이 공존하는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이후 나는 비엔날레와 상업전시 시장쪽으로 직업 노선을 변경하면서, 그녀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가끔 후배나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낸시랭의 허구성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낸시랭만큼만 열심히 해라, 작품은 취향이기에 좋고 싫음을 뒤에서 깔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노력은 진짜다" 라고 말했다.
흔히 영아티스트로 불리우는 2-30대 작가중, 낸시랭 만큼 성공하기 위해 인맥을 쌓고, 고민하고, 작업하는 작가도 드물었다.

이후 낸시랭을 보게 된 것은 TV였다.
도도한 페티시즘은 버리고, 화사한 미소로 독특한 정신세계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구나!
아티스트로서 조금은 대우를 받으며, 이곳저곳 방송의 패널로 활동하였다.
TV를 통해 인지도가 높아질수록, 아티스트로서의 특별함은 사라져갔다. 

30대 중반 이후에 이르러서는, 
이슈마케팅의 한계에 이르렀고 낸시랭이 깔아둔 아트마케팅을 답습하는 유사한 젊은 여성 퍼포머들이 등장하면서, 그녀는 그녀가 만든 그녀의 시장을 잃었다.
한계에 다다를 수록 그녀의 포장이 하나둘 벗겨졌다.
하지만 그래도 '아티스트 낸시랭'이라는 자존심만은 꺽이지 않았다.

고독한 아티스트가 아닌, 대중이 사랑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던 낸시랭은 관심이 필요했다.
그녀가 단기간에 살을 빼고 운동을 하여 피트니스 대회에 참가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영역 외적인 것이다.
짧게 보면 흔한 욕망의 관종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스스로의 인생이 곧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캠퍼스가 아닌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돌이킬 수 없는 채색을 해나가고 있는. (내가 바로 아트다 / 건담 더블오 세츠나의 독백 패러디)

몇일전부터 그녀의 결혼 기사로 떠들썩하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내면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과거 채워지지 않은 맑음을 가졌던 그녀의 순수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투명한 남편의 존재를 놓고 그녀를 염려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기자회견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낸시랭은 바보가 아니다.
'나는 몰라요, 나는 그냥 사랑할 뿐이에요'라는 백치녀(퓨어리즘) 쉴드와 밑밥을 확실히 뿌려두었다.
*  '전과자와의 사랑'을 '관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낸시랭의 선택적 행위'라고 그렇게까지 세상을 어둡게 보고 싶진 않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선택이고, 선택을 통한 아픔과 행복도 그녀의 것이다.
아픔은 그녀의 내면을 난도질 할 것이고, 행복은 그녀의 내면을 치유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본인을 캠퍼스 삼아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아티스트 낸시랭.
아둥바둥이라는 표현으로만으로는 부족한 당신의 노력에 값진 결과가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