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note
도시속의 일상, 일상속의 공간, 그 안에 머무는 삶 - 글 이영범
1. 일상, 사회성, 그리고 관계
일상, 안고 가야할 화두인가.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회성을 끄집어낸다. 왜냐하면 일상과 사회성을 어떤 울타리안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안과 밖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과 밖을 구별짓는 경계에 관계가 있다. 일상, 사회성, 그리고 관계, 이들은 한 꾸러미이다. 도시속의 일상, 일상속의 공간을 이야기할 때 이들을 동시에 들여다 보지 않으면 우리네 세상살이를 담고 있는 도시공간이 왜 이렇게 변화되는지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일상, 나만의 이야기인가. 살면서 흘려 듣고 넘기는 것들중에 막상 공들여 생각하고 자꾸만 들여다 볼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있다. 어려워도 욕심어린 눈길이 자꾸만 머무는 개념이 있는 데 그게 바로 사회성이다. 흔히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고 주변머리 좋은 사람을 일컬어 사회성이 좋다고들 한다. 이렇듯 사회성이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 관계가 드러나는 방식이 일상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을 일상성이라고 본다. 나하고 다른 이들 사이에 놓여진 관계나 그 관계사이에 얽혀있는 이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의 사회성을 일궈내는 텃밭, 그게 일상이라면 그 일상을 담아주는 장이 공간이다. 그릇으로서의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 담기는 일상은 다르다. 대체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일상이란 도시적 삶으로서의 일상, 즉 도시공간 안에 담겨진 일상이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의 문제로서의 일상의 현대성이 도시성을 기반으로 하여 유지되기 때문이다.
일상,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세상살이, 그게 일상이다. 세상살이를 뭐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반 없다. 하지만 그 세상살이를 벗어나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슬프게 들릴 지 모르지만 우린 목숨이 부지하는 한 살아간다. 그 삶이 일상이라면 일상이 주는 의미는 어쩌면 벗어나고픈 굴레일지도 모른다. 그 굴레를 벗어나고픈 몸짓 역시 세상살이일 수밖에 없으니 아무리 몸무림쳐도 우리네 삶은 결국 일상이란 테두리 안에 갇히기 마련이다. 얼핏 보면 지루하고 늘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이지만 우리는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지는 않다. 반복되는 습관화된 행위로서 우리가 사는 매일 매일의 일상은 차이가 없어 보일 뿐이다.
일상, 그 안의 사회성. 대체로 별 차이가 없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일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대체로 몇가지 패턴으로 나타난다. 그 패턴은 본능적인 행위와 사회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 즉 먹고, 놀고, 일하고, 자는 것으로 아주 단순화하여 표현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개개인의 일상은 그 누구하고도, 그리고 어느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일상을 규정짓는 것은 매 순간 주어지는 관계의 선택이다. 일상의 매 순간마다 우리는 그 일상을 매개로 연결된 관계의 선상에 놓이며 우리가 선택해야 될 관계가 변화되기도 하고 아니면 관계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변화하기도 한다. 설령 그 변화가 아주 미미한 것이라고 할 지라도 일상은 다르기 마련이다. 단순화된 패턴처럼 보이는 일상을 우리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성이나 도시성을 근거로 일상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혹은 의미)의 다양성, 이것이 바로 도시속의 일상, 일상속의 공간에 내재된 본질이다.
2. 도시속의 일상, 일상속의 공간
사라지는 것과 새로 생겨나는 것들, 그리고 작은 것과 거대한 것들. 누군가의 삶이 사라지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도시속의 일상이나 일상속의 공간 역시 사라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한다. 인생의 부침(浮沈)처럼 변해가는 도시공간의 밑바닥엔 항상 일상이 도사리고 있다. 변화하는 일상에 따라 도시공간의 한편은 무대 뒤로 사라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은 새로이 등장하기도 한다. 동네의 골목길이 기억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가기도 전에 우린 벌써 아파트단지에 익숙해져 있다. 15층이 너무 높아서 사람살기 안 좋다고들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40층이 높아서 좋다고들 야단이다. 변해가는 일상은 늘 대체된다. 동네 어귀의 구멍가게가 아파트단지내 수퍼마켓에 밀려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져 가자 그 자리를 PC방이 금새 채우고 만다. 우리의 일상안에서 대중목욕탕이 사우나로 바뀌고 재래시장이 대형할인점과 자리바꿈하기까지 그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도시속의 일상이 바뀌면서 일상과 만나는 공간과의 관계도 변한다. 대중목욕탕이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우리 동네의 일상이라면 사우나는 지난 밤 과한 술이 아직도 덜 깬 직장인으로서의 내 일상이다. 도시속의 일상은 끊임없이 공간을 변화시킨다. 변해가는 공간속에서 일상도 계속 머무르지는 않는다. 머무르지 않는 일상안에서 사라져서 안타깝기도 한 것이 있고 새로 생겨나서 좋은 것도 있다. 다만 새로 생겨나는 것들이 모두 다 좋은 것이 아니고 작은 것들이 자꾸만 큰 것에 의해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건축도 예외는 아니다. 달동네 재개발이 그렇고 도심부 복합개발이 그렇다. 이대로 밀려서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소비와 광고, 욕망. 공간과 일상은 왜 끊임없이 사라져 가고 또 생겨나는 것일까? 사회학에서는 이를 욕망과 소비에 빗대어 설명한다. 그들은 현대소비사회의 도시공간을 움직이는 일상의 저변엔 소비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기생하는 자본의 이해가 치밀하게 얽혀 있으며 그 욕망이 소비되어지는 일상의 과정을 바로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재생산되는 구조로 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굳이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대성과 도시성에 근거한 우리네 일상생활안에서 소비를 갈망하며 꿈틀거리는 욕망을 도시공간을 화려하게 수놓는 광고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경험한다. 도시적 일상을 대변하는 매개체들은 자동차에서 패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강남의 잘 사는 대형아파트단지에 세워진 차들이 대체로 고급승용차들인데 반해 강북의 고밀도 소형아파트단지의 주차장엔 거기 사는 사람들의 직업만큼이나 차종 역시 다양하다. 노량진 학원가에는 유행에 민감한 십대후반들이 숫적 우세를 보이고 점심시간의 명동은 유티폼을 입은 여사원들로 북적거리고 여의도의 증권가에는 넥타이부대들이 압도한다. 패션이 이렇듯 일상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욕망의 해방구 노릇을 하기도 한다. 오렌지족으로 대표되었던 압구정동의 로데오거리나 청담동 카페골목은 욕망과 소비에 근거한 특정한 부류의 일상이 어떻게 그들의 일상을 담아내는 도시공간을 다른 곳과 차별화시키는 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상을 대변하는 이들 매개체가 사유화된 욕망의 차별적인 소비로서 기능할 때 그 매개체로 인해 결집된 집단적인 일상은 특정한 도시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정한 일상의 공간에 대한 배타적 점유에는 항상 속물화된 건축의 상업주의가 배어있다.
낮과 밤의 일상, 도시공간의 야누스. 우리들의 일상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이렇듯 변화하는 일상을 수용하는 도시에는 낮과 밤의 공간이 서로 공존한다. 직장인에게 낮 공간의 전형은 업무공간이고 주거공간은 밤 공간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 낮과 밤의 공간은 또 다른 형태의 전이적 공간을 통해서 서로 연결된다. 주거공간(제1의 공간)과 업무공간(제2의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공간이 대체로 위락상업공간(제3의 공간)이다. 도시공간의 야누스적 얼굴은 조명에 의해 연출된다. 도시의 밤의 일상은 조명 덕분에 더욱 화려하다. 그 화려함으로 감춰진 도시의 밤의 일상은 어쩌면 지겹도록 반복되는 낮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일지도 모른다. 단정한 샐러리맨의 넥타이가 풀어 젖혀지고 연인들의 은밀한 밀어가 속삭여지는 건 아무래도 밤의 일상이다. 저녁불빛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하면 도시의 일상은 서서히 변해 간다. 도시의 한편이 비워지면서 또 다른 한편이 채워진다. 단란주점의 네온사인만 환하게 반짝이는 동네의 5층짜리 근린생활시설건물의 간판은 한 건물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낮과 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밤의 도시공간의 야누스에 여전히 일상이 존재하지만 건축은 어느새 조명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일상성의 수용, 결국은 안과 밖의 문제. 도시공간에서 일상성의 수용은 건물안과 밖 모두에서 이루어진다. 오히려 건물 안과 밖이 일상을 통해 연결된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더 정확할 지 모른다. 결국 이 이야기는 개인으로서의 건축과 집합으로서의 도시가 일상을 매개로 연결됨을 의미한다. 안도 공간이고 밖도 공간이다. 안이 건축공간이라면 밖이 도시공간인 셈이다. 도시의 수많은 열리고 닫힌 공간의 경계에 건축이 존재한다. 안의 일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최근의 건축적 태도가 인테리어 어바니즘(Interior Urbanism)이라면 밖의 일상에 대한 휴머니즘적 고민이 뉴 어바니즘(New Urbanism)이다. 안에서 수용하는 일상이 급격하게 그리고 급속하게 변화하면서 그 일상을 수용하는 공간을 조직화하는 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무실 공간이 대표적인 예이다. 조직의 위계가 깨지고 업무환경이 변화했다. 개인적인 공간보다 회의실과 같은 공동의 공간이 대우받기 시작하고 공간의 선적 조직체계보다는 입체적 조직체계가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선호되기 시작하면서 건축가들은 내부공간을 조직화하는 데 업무라는 일상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였다. 인테리어 어바니즘은 규모와 성격에 따라서 건물내부공간도 매우 복잡하고 동적인 도시성(Urbanity)을 갖기 때문에 건축의 내부공간의 조직화와 해석에 도시적 접근을 시도한 예이다. 외국기업이 서울역앞 대우빌딩사옥을 사들여 자기의 일상에 맞게 리노베이션할 때 그 내부공간을 어떻게 조직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한 해답이 바로 인테리어 어바니즘일 것이다. 80년대 말쯤 대두된 뉴 어바니즘은 특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자꾸만 개인화되는 일상과 공간을 극복하고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개념이 미국이 선봉에 선 신자유주의에 맞서고자 프랑스 좌파 사회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안한 공동체주의와 맥락을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안과 밖의 공간을 조직화하고 또 그들이 갖는 단점을 극복하는 작업 역시 일상에 근거한다. 건축과 도시, 그 경계를 가르고 또 그 경계를 이어주는 것이 아마도 일상일 것이다.
3. 일상을 통한 도시공간의 네트워킹
제임스 죠이스, 율리시즈, 그리고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가 관찰한 것처럼 죠이스는 율리시즈에서 하찮은 일상을 문학화하였다. 지겹도록 익숙한 내가 사는 동네의 하루동안의 순례기가 율리시즈이다. 수십년에 걸친 호모의 영웅적 대서사시가 더블린의 한 동네에서 단 하루동안 벌어진 일상으로 전락한 셈이다. 일상은 도시의 순례기이다. 도시공간이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더라도 일상이 단절되면 그들은 이미 남남이다. 동네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나를 남과, 그리고 나를 우리 동네와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일상이 문학화된 예를 가까이서 찾는다면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연작을 들 수 있다. 싼 보금자리를 찾아 서울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 이 연작은 원미동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을 통해 그들 특유의 공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가를 문학적 사실감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도시공간이 우리의 일상을 통해 네트워킹 된다는 사실이 문학공간을 통해 증명된 셈이다.
매개체(Media)를 통한 도시공간의 일상성 읽기. 도시를 읽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쉽게는 도시의 물리적인 형상을 읽어내는 것에서부터 좀 더 고차원적인 도시를 움직이는 내부적 동인을 분석하는 것에 이른다. 정량적이든 정성적이든지 간에 이들 분석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도시공간을,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우리의 일상을 매개체(Media)를 통해 읽어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매개체는 대체로 숫자로 표현된다. 즉 데이터화된다는 이야기다. 시간, 거리, 속도, 높이, 크기, 면적, 밀도, 가격으로 표현되는 도시공간은 너무나도 친숙하다. 도심부의 자동차 주행속도로 우리는 세계도시의 혼잡율, 도로율이나 차량대수, 그리고 공간의 효율을 상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맥도날드의 빅맥햄버거의 가격, 소위 빅맥지수를 통해 우리는 세계도시의 물가를 비교하기도 한다. 도시공간내의 비둘기 분포도는 공간의 속성과 그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성을 이야기한다. 즉 비둘기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대체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이나 공원일테고 그 공간은 관광객에 의해 압도되는 일상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일상을 통해 도시공간을 읽어내고 다시 그 공간을 조직화하는 작업이 매개체를 통해서, 그리고 데이터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디자인방법론이 데이터스케잎(Datascape)이다. 매개체를 설정하는 작업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체인화된 공간, 도시인의 삶을 어떻게 묶는가. 현대사회의 일상을 수용하는 공간 조직화의 양상중 대표적인 특징이 소비공간이 체인화(Space Chain)된다는 점이다. 맥도날드, 버거킹, KFC, 그리고 롯데리아등으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점은 도시 곳곳에 박혀있는 공간의 체인들이다. 서로가 각자의 공간적 체인을 강화하기 위해 차별적으로 행동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시의 유동인구를 바탕으로 점조직처럼 퍼져나간다. 햄버거처럼 자꾸만 표준화 되어가는 도시속에서 패스트푸드점은 우리가 잠시 머무를 수 있는 현대판 광장인 셈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있는 체인화된 공간은 패스트푸드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동차문화는 공간의 또 다른 체인화를 형성한다. 그게 바로 주유소이다. 패스트푸드점이 유동인구를 그 사업적 근거로 삼는다면 주유소는 자동차의 유동성이 높은 곳에 중점적으로 위치한다. 자동차에 기름 넣는 곳이 말 그대로 주유소이다. 이제 정보화시대에 인터넷이 유통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면서 주유소도 그 기능이 점차 복합화될 것 같다. 기름만 넣어주는 단일기능의 주유소가 체인화되어 있다는 속성으로 인해 유통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대형할인점, 또 다른 체인화된 공간이다. 이마트를 선두로 마그넷, LG마트, 월마트, 까르푸등이 쇼핑이라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간다. 동네구멍가게나 시장에서 매일매일의 장보기가 아파트단지의 수퍼로 옮겨지더니 이제는 대형할인점으로 유행처럼 번져나간다. 덕분에 두부, 콩나물은 물론이고 에어콘, 세탁기등의 제법 덩치가 나가는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타이어같은 색다른 소비재까지 한 곳에서 소위 원스톱 쇼핑이 가능해졌다. 시장에서의 장보기가 여자들만의 영역이었다면 대형할인점에서의 장보기는 온 가족의 나들이가 되었다. 장보기의 일상에서 성(Gender)의 차별을 자연스레 무너뜨린 도시공간이 바로 대형할인점이다. 근엄하기만 하던 대기업의 부장님도 수레를 끌면서 부지런히 가격을 들여다 본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은 대형할인점의 등장을 부추겼고 동시에 대형할인점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일주일 단위로 포장된다. 대형할인점에서 구매한 일주일동안의 삶은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안으로 꾸겨져 들어간다. 냉장되고 냉동된 일주일의 먹거리로 우리의 일상이 더 윤택해지는 지는 의문이다. 다만 대형할인점에서의 쇼핑이 유목민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대변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멀리에는 대형할인점이 있지만 집 가까이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있다. 일상이 잠들지 않는 한 편의점은 도시의 꺼지는 않는 불이다. 이래저래 도시공간안에서 우리들의 삶은 자꾸만 편해진다. 편해지는 만큼 뭔가 잃는 것 같아 불안하다.
4. 사유, 공유, 그리고 사회화의 문제
도시공간의 모순과 불균형. 소비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문제, 육체의 문제, 이미지, 기호와 욕망의 문제, 조작의 문제, 소외와 지배의 문제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모순덩어리의 도시공간은 합법화된 테두리안에서 우리의 일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합법화된 일상이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다수에 의해 소수가 배제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현실화된 소수의 이해관계에 다수가 반발하기도 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도시공간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해관계의 장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모순과 불균형은 이해관계의 소산이다. 이해의 조절장치가 제도적인 범주를 넘어서서 개인의 참여를 바탕으로 재조직화되는 추세이다. 대표적인 양상이 시민운동(NGO)이다. 일상을 매개로 한 도시공간에의 사회적 참여로서의 시민운동이 일산의 러브호텔이나 용인의 난개발이 갖는 합법적 모순을 풀어나갈 마지막 보루로 여겨진다. 시민단체운동을 통한 도시공간의 모순과 불균형에 대한 견제와 보완의 노력은 결국 공공성과 사생활(Privacy)에 대한 논의, 즉 사유, 공유, 그리고 사회화의 논의로 귀결된다. 사생활에 대한 보호와 공공성의 회복, 그리고 이들의 사회화 과정은 인간성 회복의 문제이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되는 일상이 인간성을 상실할 때 그 일상을 수용하는 도시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터전안에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직면하는 우리의 일상은 나의 문제, 당신의 문제, 그리고 우리의 문제이기에 모두의 관심과 참여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도시공간안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온 이슈는 인권, 환경, 노동, 그리고 성(Gender)문제일 것이다. 인권과 환경, 그리고 노동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성의 사회적 이슈화는 사회저변에 음성화되어 있었던 부분을 사회화과정을 통해 치유하고 동시에 음성적으로 존재하는 소수를 사회적으로 포용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차이가 차별화되지 않고 공존할 때 데이빗 하비가 이야기한 것처럼 도시정의(Urban Justice)가 실현될 것이다.
자율적 사회화의 장치, 도시공간의 유머와 민주성. 사진 찍으러 서울시내를 돌아 다니다 보면 항상 마주치는 질문이 있다. 무엇이 도시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유머인가? 어떨 때 도시공간은 민주성을 갖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유머는 민주성을 근거로 할 때 생명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서울이란 도시공간에서 유머를 느낀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울이란 공간이 민주적이라는 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고 그 안에 수용된 일상이 여유롭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부담스럽다. 유머는 일상의 여유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유머를 수용하는 도시공간은 민주성에 근거하여 운영되어야 한다. 새롭게 단장한 삼성본관 앞에 보란 듯이 서 있는 검정색 양복차림의 경호원들에 의해 카메라사용이 제지당하고 햄버거 가게 사진 한장 찍는데 온갖 스릴을 맛보아야 하는 서울의 현실에서 독재를 느낀다면 빙그레 미소지으며 나즈막하게 '노 플래쉬(No Flash)'하며 뒷짐진 채로 살며시 다가서는 외국의 미술관 경비아저씨에게서 유머를 느낀다. 유머와 민주성을 통해 각자의 일상이 좀 더 여유로와 진다면 도시공간과 일상의 모순과 불합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율적으로 치유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도시공간의 유머와 민주성은 사회제도나 운영체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물리적 환경디자인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건축이 모여서 도시라는 집합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말고 건축을 도시라는 집합을 이루는 개인으로 들여다 보자. 그러면 건축도 남을 고려하게 된다. 남을 고려할 때 비로소 민주성은 시작된다. 그래야 웃을 맘도 생긴다
'blog/note'의 다른글
- 현재글도시속의 일상, 일상속의 공간, 그 안에 머무는 삶 - 글 이영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