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희 매니저 논란에 대해.

2019. 1. 2. 11:11blog/note


황광희 매니저로 방송에 출연한 유시종씨가 퇴출되었다.

방송에서의 퇴출만이 아니라, 회사로부터 퇴사되었다.

퇴출과 퇴사의 이유는, 그가 학창시절 일진이었다는 이유이다.


나 역시 일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남중 남고를 나왔다.

하지만 이유없는 교내폭력이 그리 많은 학교도 아니었고, 일진이었어도 좋은 대학을 가야했기 때문에 학습분위기를 망치지도 않았다.

강남 8학군에 포함된 학교기 때문에 일진이 돈을 뺐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일진이라는 것은 학교 수업이후에 당구를 치고 포커를 치고 나이트를 가는, 일탈의 집단 정도였다.


이런 학창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솔직히 모르겠다.

학창시절 일진 무리에 포함되어 동급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 나쁜 것인지,

학상시절의 아픔을 마음에 품고있다 기회가 되어 보복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인지.


하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알수 있는 나쁜 것은 있다.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들을 방관하였던 이들, 

훗날 괴롭힘을 당한 친구들의 증언에 들러붙어 인터넷에서 일진사냥에 나선 이들이다.

과거 현실의 방관자 = 현재 온라인의 댓글러


교내에서 상처를 주는 인간이나, 상처를 받는 인간이나, 모두 잘못된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폭력의 시작이라는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 시작된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언쟁을 하다, 친한 친구를 때렸을때. 

폭력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한 순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상실하고, 폭력의 장점에 빠져든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주먹질을 하였던 친구들을 나이가 들어 만나보면, 대부분 과거의 자신을 비난한다.


누가 상처를 주는 인간이고 누가 상처를 받는 인간인지, 방관자들은 알고 있다.

또한 방관자들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제의 원인 또한 알고 있다.

폭력이 진행중인 시점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 지나 과거사를 끄집어내 보복한들 상처받은 자의 상처가 지워질리 없고, 새로운 폭력이 시작될 뿐이다.


뭉치었을때 가장 큰 힘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 또한 방관자들이다.

방관자들에게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방관자들이 뭉치어 대응할 수 있는 현명한 지혜와 환경을 요구하는 것이다.


비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방관자(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다면,

친일사전과 같이 일진사전을 만들어,

일진들의 학창시절 만행을 기록해 성장후에 사회생활을 차단시켜 버리는 것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미 진행된 상처의 주범들을 희생시켜, 앞으로 진행될 수 있는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과거의 희생이 나름 의미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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