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월간 [Art in Culture] 온라인 홈페이지( www.artinculture.co.kr ) - 김복기의 k-file
‘보고 버리는 잡지’가 아닌 잡지 / 글_김복기
‘한국미술, 거품을 줄이자!’ 언젠가 나는 이렇게 외쳤다. 거품론의 표적에는 당연히 미술잡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번 9월호는 양적으로 거품이 부풀어 오른 잡지를 만들고 말았다. 창간 이래 가장 많은 지면이다. 외국의 많은 잡지들은 사정이 다르다. 여름 바캉스가 끼어 있는 7·8월호를 시의성과 무관하게 미술관 가이드북이나 특별호 형식으로 꾸미곤 한다. 잡지도 휴가철을 맞는 셈이다. 나는 십수년 전부터 이런 모범적인(?) 잡지 제작 시스템을 도입, 1년 중 한번쯤은 여유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자고 벼르고 벼렸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해마다 여지없지 깨졌다.
연초부터 준비한 논문 특집호를 내놓는다. 애초에는 특정 지역이나 시대, 장르 혹은 사조로 미술담론의 폭을 좁혀 보려고 했다. 말하자면 똑떨어지는 하나의 이슈를 설정, 여러 필진들의 힘을 모아 이론적 성과물을 공동 생산해내고 싶었다. 잡지의 가벼움을 전문지의 무거움과 깊이로 만회해 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반기 동안 논문 특별호 기획과 진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이슈에 집중하여 논문호의 틀을 구성하려 해도 필진 구성의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이론가들은 너무 바쁘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번 기획은 젊은 이론가들의 논문 모음집으로 꾸몄다. 싱싱한 지적 열정을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해 주자.
미술잡지는 잡지인 이상 결코 학술지가 아니다. 미술잡지는 미술이라는 특정 영역을 다루는 이상 결코 일반 잡지가 아니다. 미술잡지는 학술지가 되어서도 안 되고, 대중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여기서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갈등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주장한다. 미술잡지란 ‘보고 버리는 잡지’가 아니다. 두고두고 보고 읽는 잡지다. 따라서 당연히 전문성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의 잡지론은 지금 강력한 위협을 받고 있다. 몇 가지 미술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첫째는 ‘보고 버리는 잡지’의 등장이다. 정보화 시대에 신속한 정보, 다량의 정보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실제 우리 미술계에도 무가지(無價紙)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독자들은 공짜인데다 정보 입수라는 매력을 함께 즐긴다. 무가지는 발행 부수가 많아 노출 빈도가 높다. 그만큼 또 다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정보지는 인터넷의 파급력과 함께 미술잡지의 입지를 좁히는 시대 변화다. 둘째는 미술잡지가 더 이상 이론 발표 무대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미술관련 이론 단체나 학회만 해도 수십 개에 이른다. 이 역시 거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난 상반기에도 학술발표회가 일주일이 멀다하고 연이어 열렸다. 행사는 학회지나 논문집 발간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다 각종 단발성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오래 전의 일이다. 미술잡지는 이론가 데뷔 코스였다. 이론가들의 실천 무대였다. 학술단체 활동의 성황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학술과 현장의 연동성과 호환성, 그런 건강한 관계를 유도하는 미술잡지의 고리 역할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미술전문 도서의 출판도 얼마나 많이 늘어났는가? 그럼에도 잡지는 이론(가) 부재에 허덕이고 있다. 미술잡지에 실리는 글은 학술 활동의 성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대다수 이론가들은 미술잡지에 실리는 글을 자투리로 치부한다. 셋째는 현대미술의 담론이 전시기획으로 확연히 이동하고 있다. 시대 추세다. 전시가 비평적 담론 생산의 기능을 맡고 있고, 큐레이터가 문화생산의 선봉에 서 있다. 전시는 구체적인 물건(작품)을 소통의 매개를 삼는다. 아주 실체적인 접근이다. 미술관 문화는 많은 부분 잡지의 기능과 겹쳐 있다.
잡지를 둘러싼 미술 지형이 바뀌고 있다. 분명 미술잡지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미술잡지의 생존의 길을 찾는다. 나는 미술잡지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나는 미술잡지의 독자적 경쟁력을 내세운다. 전문성과 대중성, 학술과 현장, 실제와 가상을 잇는 미술의 가교. 그 지향점은 바로 출판(문자) 매체, 저널리즘으로서의 독자성에 있다. 이것이 허황된 '잡지 이상론'이 아니라면, 나는 내일도 미술잡지를 계속 만들 것이다.